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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하누카, 그 절묘한 경계 안에서
서방 기독교 국가들의 가장 큰 절기라고 한다면 뭐가 있을까? 메리~ 크리스마스! 바로 “성탄절”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이 가장 큰 겨울 절기이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은-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모두 이 날을 가장 성대하게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요즘 많은 서양 국가들이 특정 종교성을 지닌 행사와 이름을 지양하면서 더이상 메리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안하고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s)라고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 그리고 산타클로스는 빠지지 않고 교회 마당에는 네티비티 이야기를 상징하는 동방박사와 말구유의 아기예수가 놓여져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떨까? 유대교의 성지이면서 기독교의 성지인 이스라엘은 유대교 전통이 사회전반을 지배적으로 다스리고 있지만 기독교적 색채를 무시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와 유대교의 절기인 하누카를 같이 보내고 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는 하누카의 절기와 크리스마스가 묘하게 겹쳐지면서 두 절기간의 묘한 경계와 경쟁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조금 진보적인 유대인들은 “크리스마스누카~(Christmassnukah!-크리스마스와 하누카의 합성어) 혹은 하누카리스마스(Hanucharistmas) 등으로 인사하기도 한다. 보통 메리크리스마스와 해피 하누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Photo by cottonbro studio on Pexels.com 하누카를 어떤 날일까? 성경에는 크리스마스도 하누카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하누카로 이야기 되는 수전절(성전수복인)은 요한복음에 단 한차례 등장한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 요한복음 10:22
이 때 등장하는 수전절이 바로 하누카이다. 하누카는 유대인들이 헬라제국의 통치자 중 한명인 셀로쿠스 왕조에 맞서서 성전을 다시 되찾은 날이다. 일명 마카비 혁명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날은 유대인들이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점령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은 날로 기념한다. 이 날에 다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의 촛대에 불을 밝힌 날로서 “빛의 절기”라고도 불리운다. 이 날은 유대인들이 다시금 자신들의 신앙의 처소를 되찾은 날이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보인 날로 여겨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8일간 지켜지는 이날은 키슬레브 25일(유대력 넷째달, 보통 12월 초순에서 중순에 찾아온다)으로 첫째날부터 총 8일간 하누키아라고 불리우는 촛대에 불을 키게 된다. 매일 하나씩 늘려가는 불을 숫자는 첫 불이 켜지고 난후 다음 거룩한 기름이 준비되기까지 8일의 시간을 상징하며 이는 성전을 되찾은 이후 다시금 거룩한 기름으로 불을 밝히기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보통 하누카때 사용되는 촛대는 일반적인 메노라(촛대)와는 다르며 이를 하누키아라고 불리운다.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촛대는 일곱가지를 가지는데 하누키아는 아홉개의 가지를 가지게 된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총 8일간 지켜지는 하누카는 총 8개의 불을 밝히는 촛대를 가지고 있지만 가운데 하나는 계속 켜져야 하는 불이다. 즉 가운데 촛대에서 불을 붙여서 나머지 촛대의 불을 밝히게 된다. 그래서 아홉개의 가지를 가지는 메노라를 밝히게 된다.

이 주간에는 전통적으로 먹는 음식들이 있다. 주로 기름에 튀기거나 기름을 사용한 요리를 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도너츠이다. 기름에 튀긴 도너츠는 겨울 절기의 별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감자전과 같은 음식을 하고 기름기가 많은 소고기를 가져다가 브리스킷이라는 요리를 해 먹는다. 일면 우리나라로 하면 소고기찜과 같은 요리이다. 어떤 음식이든지 기름과 관계된 것들이면 대부분 즐겨 먹는 하누카 음식이 된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 하누카, 그런데 성경에 단 한차례 등장하는 이 절기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의미는 무엇을까? 억지로 이렇게 저렇게 맞추다 보면 의미야 있겠지만 어거지로 맞추어서 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몇가지 그 상징성들을 연결해서 본다면 두 절기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시야를 가지게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첫째 크리스마스와 하누카는 모두 절박한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익히 알지만 크리스마스는 초대 기독교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절기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다른 이방 종교의 신들과는 다른 탄생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이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안에 있는 약속의 성취이며 상징이라고 보게 된다. 그렇기에 이전에 존재하던 모든 이방신들의 기념일들은 하나님의 탄생하심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성탄절이 가지는 그 의미를 드높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어거지식 끼워맞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의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닌 탄생의 이유가 중요하다고 보면 결국 인간의 죄악을 좌시하지 않았던 하나님이 그 약속대로 죄사함을 위한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게 하신 것이다. 그 분의 오심은 언약대로 하나님의 약속대로이며 이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게 된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애굽기 2:23-25출애굽기에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일하셔서 결국 모세를 선택하고 보내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성탄절은 이와 같다고 본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은 만물과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오신 것이다.
하누카는 그런 고통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내딛었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내어던지고 성전을 지켰던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는 바로 빛되신 예수이다. 하누카가 빛의 절기이다. 그 빛은 성전을 밝히는 것이며 성전의 등은 꺼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등이 껴져 있었다. 이방신들의 제사로 하나님의 빛은 꺼져 있었고 죄악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마카비는 유대인들 자신들의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에 회개하고 더렵혀진 하나님의 처소를 되찾고자 목숨을 걸었다. 그에게는 빛이 보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을 향하여 나아갔고 승리할 수 있었다.
목동들은 밤에 천사를 만났고 빛을 만나고 빛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나섰다. 동방박사는 별빛을 따라왔고 결국 별빛의 인도로 왕을 영접하게 된다. 이 두 절기는 하나님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Photo by Martin Mariani on Pexels.com 세번째로 회복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회복을 위함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서 그분은 철저히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하누카는 회복을 의미한다. 성전의 회복, 예배의 회복, 그리고 헌신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회복과 철저한 순종을 향한 회복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지독하리만치 율법에 철저하려고 하였고 정죄하고 비난할 수 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
하누카 크리스마스 모두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삶 속에 남아있는 전통 속에서 여전하다. 그리고 그 의미 또한 쉽게 지나치거나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욱 올바른 의미를 비추어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오늘 저녁 도너츠 하나 입에 물고 산타가 아닌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읽으면서 한껏 웃어보면 좋을 거 같다.

Photo by Tim Douglas on Pexels.com -
12월,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짧은 생각
어느샌가 2022년 한해가 저물었다. 더이상 남은 시간은 2주도 채 안되는 시간. 뒤를 돌아보면 놀라울 따름이고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올 한해는 무척이나 분주하면서도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내 자신이 무력한 것을 수차례나 경험한 시간들이었다.

귀한 만남의 시간도 있었고 또 가슴 아픈 헤어짐의 시간도 있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또 잘 아는 누군가와는 더 깊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자신의 자리가 한 단계 변화되었는가 하면 여전히 부족한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빈궁함이 부요함보다 더 많은 시간이었지만 영혼은 언제나 하늘 높이 올려지는 시간이면서 현재를 돌아보며 좌절하고 낙심하는 시간이면서도 아침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도 하였다.
바울의 고백처럼 ” 나는 날마다 죽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할 수 있는 고백은 단 한가지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무한한 그 은혜, 이 자리에 있게 허락하신 그 은혜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새로운 해가 되면 갑작스럽게 변화는게 있을까? 물론 그런 것들도 기대하지만 내 심장이 감당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자고 나면 새로운 하루가 더욱 크고 감사한 은혜로 넘치길 기대해 본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하누카~ So long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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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넷째주] 그렇게 이끄셨다…
오늘 아주 귀한 모임에 초대되어 갔습니다. 음…초대라기보다는 불려갔다는게 더 맞을거 같네요. 현재 우리는 이스라엘에 있는 단체인 코너스톤이라는 단체에서 비자를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속은 현재 코너스톤인 것이죠. 이 단체는 약 120년 단체로 주도적으로 이스라엘 내에서 복음주의연맹(Evangelical Alliance Israel)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모임에 가게 된 것입니다. 불러간 것이지만 정말 잘 불려간 것입니다. 오늘 그 자리에는 정말 각양각색의 전도자들과 사역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호명되어지고 소개되는 단체나 개인들은 모두가 열정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과 아랍인 그리고 팔레스타인들을 향해서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일들을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아직 다 모인 것이 아니라고 하니 얼마나 더 많을까 기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스라엘에서 6년을 갓 넘기는 아직은 어린 사역자들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정말 오랫동안 이 땅에서 그리고 한 자리에서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신 분들과 각자의 특기를 살려서 많은 영역에서 이 땅과 이 민족들을 섬기는 것을 들었을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섬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학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지식적 사실적인 것들을 전달하는 이들이 있고 또한 복음으로 섬기는 이가 있습니다.

함께 중보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국인 사역자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오늘 그 가운데서 특별했던 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조사하고 연구한 것을 책으로 펴낸 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믿는 유대인들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저 떠도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을뿐 정확한 통계나 자료를 제시한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종종 이스라엘 통계청에서 발표되는 자료에는 오류가 많았습니다. 기독교인구를 분류할 때 종교적 분류로 인해서 메시아닉 공동체들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고 대충 기독교인구수에 얼버무려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소개된 이 한권의 책은 그동안 목말라 있었던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10년(1999년부터 2010년)까지의 조사내용과 최근 진행된 설문조사까지 다양하게 담고 있었고 각 메시아닉 공동체들이 가지는 특성을 지역별 언어별 등으로 나누어서 세부적으로 조사하고 다루었다는 점에서 괄목한만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어서 읽고 분석해서 앞으로 기도하는 방향성과 또한 이스라엘을 알리고 나누는 것에 있어서 명확한 사실을 제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 모임을 참석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하나님이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시는 방향을 잘 모를때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큰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항해사가 해와 별을 관측하여 방향을 잡고 조타수는 지시에 따라서 배를 이리저리 몰고 나갑니다. 하지만 그들처럼 지식이 없는 이들은 그저 똑같은 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것처럼 보입니다. 망망대해는 망망대해니까요. 어디로 가야 맞는 것인지는 오로지 항해사와 조타수만이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KRV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고 할지라도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방향성만큼 잘 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사역할 당시 수많은 행사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어떤 행사의 이름만 들어도 이건 어떻게 하면 되겠다라는 일명 “견적”이 나옵니다. 대충 비용도 생각할 수 있구요. 그렇다보니 이스라엘에서 가끔 행사하는 것을 보면 저건 이렇게 하면 될텐데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이렇듯 사람일지라도 해본 경험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그것을 가장 좋은 방향성으로 이끌어 가는 것인지를 알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시편 23:3 KRV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언제나 우리가 중심이 되다보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안주시는 하나님께 불편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생각했을때 좋은 방향성이 아니기에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의의길은 때로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항상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준은 조악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경험이나 깊이가 조악하기 때문입니다. 80년을 살아도 시간의 너머에 계신 하나님보다 더 깊은 지혜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말은 어찌보면 인간적으로 틀린 말은 없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욥의 고난은 분명 욥이 잘못한 것이 있거나 무언가 하나님께 심판받을 일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런 정의로운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까닭없은 고난은 없다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욥은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러셨으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또한 그리 석연치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이자니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고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만 그러면서 하나님의 불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욥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성경을 보다보면 왜 그러셨지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기자는 명확하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나요?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이라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왕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시종들을 거지같이 대하겠습니까? 영국의 버킹검 궁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다운 옷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혹은 이끄셨다라는 말에 아직 완성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직은 보잘 것 없는 모습이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기에 그 나머지 길들을 이끌려 가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것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이끄셨으니 더 멋진 것이 남았다는 기대감으로 잠시나마 들었던 저의 푸념과 불안이 사그러드는 오늘입니다.

싱글로 이스라엘 라투른 지역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사역하는 브라더 지그프리드는 큰 도전을 주었다 -
[2022년 5월 셋째주] 왜 사는가?
인생을 살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왜 사는가란 질문이다. 왜?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해?
나도 살아가면서 이 질문을 많이 듣고 대답하고 살아왔다. 특히나 신앙인들은 이런 질문을 곧잘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를 묻고 답한다.

정원에 달린 열매,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란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연한 답을 우리는 당연히 알지만 아주 당연하게 여기다보니 쉽게 지나치고 넘어가기 일상이다. 교리문답에 보면 “인간이 지음받은 가장 중요한 목적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다.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그러나 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고전10:31, 우리말성경)
하지만 우리는 이 당연한 답을 알고 있어도 이 당연한 삶을 살아가지를 못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니 엉뚱하게 적용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부딪히던 것이 있다. 소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그 학업성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있었다. 그들을 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는 건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라고 하지만 학생의 본분은 배움이다. 거기에 학업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봉사만 열심히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결국 신앙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 백성은 나를 찬양하게 하려고 내가 손수 만든 사람들이다. (사43:21, 우리말성경)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려고 우릴 지으셨다고 하신다. 결국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는 존재이다. 그 찬양은 결국 하나님과 관계 안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연애 할 때 상대방이 무엇틀 좋아하는지를 궁금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즐겁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물어보고 알려고 노력한다. 그 가운데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결국 왜 사는가? 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하기 위해서 산다” 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고민이고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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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날맞이 특별글] 공산주의자 가정에 나타나신 하나님-요셉슐람 장로님이야기
살아가면서 누구나 스승을 만난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스승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저런 사람을 되지 말아야지 하는 스승도 있다. 매년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생님들을 찾아간다. 학창시절에는 너무나 힘들었던 선생님들이 나이가 들면서 이해가 되고 존경이 되면서 찾아가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스승님이 몇분 계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스승님들은 돌아가셨거나 너무 멀리 계셔서 찾아뵙지를 못한다. 그리고 그 스승님들 가운데 나를 기억해 주는 분들은 없다. 다들 희미한 기억 속에서 혹은 그냥 눈치껏 아는 척을 하실 때가 있었다. 괜찮다. 원래 내가 학창 시절에 그렇게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스승님들의 이야기들과 질책들은 여전히 나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Photo by fauxels on Pexels.com 나이가 들고 자라면서 그리고 삶의 터전들이 바뀌면서 스승님들의 가르침들은 중요한 삶의 지표들을 만들어 왔다. 그 가운데 현재 사역에 있어서 큰 방향성을 주신 분은 (고)조용기 목사님이다. 그분의 설교와 책들 그리고 직접 만나면서 들은 조언들은 지금도 나의 삶과 사역의 방향성을 지지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와서 또 그런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쉽게 만나질 수 없는 그런 만남이었다.
이스라엘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메시아닉 공동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60-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시기라고 불리울 수 있는 이 시기에 수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찾아온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외로움과 혼자만의 두려움을 가진 채 이스라엘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서로를 발견하고 공동체-우리로 말하자면 교회와 같은-모습을 가지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열리게 된다.

Photo by Karolina Grabowska on Pexels.com 그런 공동체들 가운데 네티비아라는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요셉 슐람 장로님에 세워진 공동체로서 1969년에 텔아비브에서 시작하여 1982년부터 현재까지 네티비아 성서아카데미라는 비영리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 비영리 단체는 이스라엘 메시아닉 공동체 최초로 유대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자신들 고유의 장소를 만들었다.이전까지 대부분의 메시아닉 공동체들은 교회의 건물을 빌려썼지만 네티비아는 최초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물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지난 4월달에 요셉 슐람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자리에서 장로님은 너무나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고 많은 도전과 가르침을 주었다.
요셉 슐람 장로님(이하 요셉)은 17살 때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분의 가정은 철저한 공산주의 가정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공산주의로자로서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살면서 공산주의적 사고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온 요셉은 종교적 관심도 없었고 그저 삶에 충실했다. 그런 그가 복음을 들었을 때 충격이었다. 그가 살아온 짧은 생애를 송두리채 바꿔버린 것이었다. 신약성서에 나온 예수의 가르침은 그를 흔들었고 하나님 안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쫒겨났다. 복음을 전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부모님은 그를 쫓아내었고 요셉은 지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조지아주의 시골마을에 있는 기독기숙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된다. 이 고등학교는 일종의 대안학교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디서든 사고를 치고 마지막으로 이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주지사의 아들도 있었고 목사의 자녀들도 있었다. 그리고 오갈데 없는 요셉과 같은 유대인들도 있었다. 요셉은 그 학교로 간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였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고 학생들을 전도하여 예배모임을 만들기 까지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히브리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은 어머니의 사고 소식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공장에서 관리직에 있었다. 하루는 공장 직원이 실수로 인화성 물질에 불을 내었고 어머니는 공장을 지키기 위해서 인화성 물질이 담긴 통을 필사적으로 옮기다가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요셉에 공항에 도착하는 날 어머니는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보기를 거절했다. 결국 요셉은 혼자 집을 얻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명절이 되어서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요셉도 자신의 믿음을 굽힐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그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어왔다. 요셉은 자신은 누구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이해하려면 신약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며칠 뒤 어머니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요셉의 어머니는 그가 건낸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의 가르침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한다. 자신은 하나님은 안 믿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훌륭하고 동의한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예수라면 자신이 꼭 따르고 싶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라는 말에 그녀는 놀라워 했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를 따르고 더 알기 원한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언제든지 준비되었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를 데리고 온천으로 갔다. 화상을 입은 그녀는 일반 물에 들어갈 수 없기에 그녀에게 알맞은 온천에서 그녀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녀는 열렬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믿음이 사람이 되었다. 요셉은 지금도 그와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하나님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만 확신할 뿐이다.
어머니의 변화는 곧 아버지와 가족들 모두에게 변화를 일으켰다. 공산주의자에 철저한 관리인이었던 어머니의 회심은 가족들 모두에게 도전을 주었고 요셉은 가족 모두에게 세례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열렬한 후원자이고 지지자이다.
요셉은 매우 뛰어난 지식과 학식의 소유자이다. 그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고고학과 성서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 신약과 화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유대교 예시바(신학교)에서 3년 반동안 유대교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대학에서 다시 유대교 전통과 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그가 이런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 때문이었다. 그는 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는가에 대해서 두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며 메시아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두번째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연합을 위함이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남은 우리가 연합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고 이어주기 위해서 모든 영역에서 공부하고 준비한 것이다.
만나는 동안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하고 귀중했다.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 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점도 많은 도전과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고 살아온 바탕을 뒤집는 것이다. 마치 공산주의가였던 그의 부모님이 신앙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약성경을 준 이는 그런 미래까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기가 지금의 요셉 슐람 장로님을 만들어 준 것이다.

요셉 장로님은 나에게 도전을 주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나누라고 하셨다.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다. 2시간 넘는 시간동안 함께 하면서 유대 공동체 1세대들의 역경과 승리를 옅볼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난 숫자적 부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일하고 계셨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 되고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길에서 그분의 등을 보았다. 반세기의 무거운 짐을 지었던 그의 등에서 여전한 힘을 보았다. 지쳐있지 않은 강인함. 그런 그의 모습에 도전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의 언덕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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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신분일까??-폴란드 난민센터를 다녀와서
나에겐 3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그 친구는 현재 폴란드에 살고 있다. 약 8년전 한국을 떠나 폴란드로 취직하여 가게 된 동생. 수많은 고생과 역경 끝에 현재 꽤 괜찮게 살고 있다. 그런 동생 덕에 이스라엘에 살면서 폴란드를 몇차례 방문할 수 있었고 즐거운 시간을 종종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올해에도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올해 조금은 다른 일로 동생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터진 후 2년동안 해외출입이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제약이 많이 풀리게 되면서 큰 맘을 먹고 동생네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다른 선교사님 커플과 함께 였다. 그 이유는 얼마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난민들이 폴란드로 많이 넘어왔다는 소식을 들어서 였다. 우리와 친한 우크라이나 선교사님도 이번에 폴란드로 넘어와서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함께 기도하고 소식을 듣고자 겸사겸사 방문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서 2백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그 난민들은 집을 떠나야 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채 남의 나라에 와야 했다. 남편은 혹은 남동생이나 남자 형제들은 우크라이나에 남겨두고 떠나와야 했던 그들은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감히 상상이 안간다. 그 중 폴란드에는 우크라이나 난민이 2십만명이나 있다. 그들 중 우리 선교사님의 교회 성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교사님도 전쟁으로 인해서 교회를 떠나야 했던 아픔을 안고 또 성도들을 내버려 둔채 나와야 했던 미안함으로 인해서 맘에 큰 어려움을 갖고 계셨다. 어떻게든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서 폴란드로 오게 된 선교사님은 여러방면으로 알아보고 노력하고 계셨다. 내 동생은 그런 선교사님을 돕고 있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다른 나라이기에 여러가지로 어려운 나라이다. 법적이나 환경적으로 많은 일들이 낯설고 어려운 땅에서 내 동생은 너무나 큰 도움이었다. 그러나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

거리에서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 진행중이었다. 사람들은 환경이 바뀌면 생각이나 자세가 바뀌게 된다. 그러나 한 곳에서 오래 살다보면 그 곳에 익숙해지게 되고 그곳이 모든 삶의 기준이 되게 된다. 한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한국이 기준이 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처럼 사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고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을 그 기준으로만 판단하게 된다. 폴란드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난민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난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집을 떠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가치관의 변화와 세계관의 변화일 것이다. 기존에 살아왔던 모든 기준들이 더이상 자신을 지탱해주지 못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통제되었던 환경을 떠나 통제되지 않고 확신할 수 없는 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은 혼란스러움만 남았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의 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절망하고 주저 앉는 것 밖에 없을 것이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난민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을 충분히 추스르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럽고 힘들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고 다시금 돌아가려고 의지를 세우고 있었다.

주일에 말씀을 나눈 우크라이나 공동체 식구들(동생이 통역을 하였다.) 선교사님은 그런 상황에서 피난온 성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미고 살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집을 알아보고 예배장소를 알아보고 기도하고 구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들을 내 동생과 함께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사역도 열리고 있었다. 현지 폴란드 목사님을 통해서 지역 난민센터의 봉사길도 열리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난민들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언가 마음을 잃어버린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결단 그리고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우연히도 이번 폴란드 행에서는 그런 선교사님의 사역 준비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정말 쉽지않은 기회였다.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센터 중 한 곳에 난민 아이들을 위한 교육센터를 열기 위한 준비를 도울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난민센터를 방문하고 사역적 준비를 도우면서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난민세터 아이들을 위한 임시교육시설을 준비중이다. 사실 나는 동생을 만나러 오랜만에 간 거였다. 2년동안 못만난 동생을 만나러 가게 된 우리에게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시선을 만나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들의 안전한 공간에 살고 있다. 우리는 결코 누구도 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나름 자신의 삶을 통제 아래 두고 오늘 할일과 내일의 일들을 구상하고 이루어가고 있다. 난민이란 마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나 에티오피아 인들 그리고 시리아와 같은 전쟁을 치른 이들이 갖게 되는 신분이라고 생각한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우리가 난민일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폴란드 행에서 나는 난민이라는 것은 결코 전쟁이나 어떤 재해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그리고 느껴지는 환경이 그렇게 되었을때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선교사님이 그랬다. 한국인이고 나라도 그대로 있지만 그 분이 살았고 사역 했던 나라의 상황이 그대로 그분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분 스스로도 자신이 난민이 되었다고 하면서 혼란스러운 그리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조금은 충격이었다. 우리는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에덴동산 이후로 오랜 시간동안 난민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처없이 떠도는 영혼이 된 것이 우리이다. 그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시고 그 영혼들에게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선포하셨다. 영적 전쟁 가운데 난민으로 떠도는 우리가 정착할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난민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알려주고 있는데도 그렇다고 확인시켜주는 대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민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크라이나 난민들 중에 난민 캠프에 남은 이들은 폴란드나 다른 나라에 연고나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이 남았다. 대부분들이 집시이거나 혹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다. 아니 진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탈출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탈출해서 나올 수 있었던 이들은 더 감사해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이들도 있다. 전 국토가 전쟁에 놓여있으나 아직도 괜찮은 곳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도망나온 이들은 위험한 지역에 있던 이들고 아직도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진짜 난민들은 누구일까?
누구도 난민이 될 수 있다. 전쟁 속에서 누구도 난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아니어도 난민이 될 수 있다. 내가 어디에 속하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잃어버렸을 때 난민이 되는 것이다. 나라를 잃어서가 아니라 민족을 잃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속한 것인지를 잃어버렸을 때 난민이 되는 것이다.

네게브 한 복판에 세워진 오브제, 귀환하는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이번 폴란드 행에서 많은 생각들을 해 보았다.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 어느 것부터 정리해야 할까도 고민이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내 글을 읽던 이들 중 “네가 그 상황이 안되어봐서 모른다”라고 할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꼭 당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 있지만 그 상황을 한발짝 물러섰을 때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렇기에 난 한발짝 물러선 입장에서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말이 꼭 맞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난민은 누구일까? 아니 나의 신분은 무엇일까? 그런 의문을 가진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피곤이 쌓여서 이틀동안 쉬고 있지만 다음주부터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적어봐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