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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투이스라엘(B2IL)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이어주고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심을 보면서 열방을 향한 뜻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함께 배우면서 알아갑니다. 저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과 열방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세우신 민족인 이스라엘을 통해 지금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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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셋째주] 왜 사는가?
인생을 살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왜 사는가란 질문이다. 왜?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해?
나도 살아가면서 이 질문을 많이 듣고 대답하고 살아왔다. 특히나 신앙인들은 이런 질문을 곧잘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를 묻고 답한다.

정원에 달린 열매,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란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연한 답을 우리는 당연히 알지만 아주 당연하게 여기다보니 쉽게 지나치고 넘어가기 일상이다. 교리문답에 보면 “인간이 지음받은 가장 중요한 목적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다.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그러나 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고전10:31, 우리말성경)
하지만 우리는 이 당연한 답을 알고 있어도 이 당연한 삶을 살아가지를 못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니 엉뚱하게 적용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부딪히던 것이 있다. 소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그 학업성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있었다. 그들을 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는 건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라고 하지만 학생의 본분은 배움이다. 거기에 학업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봉사만 열심히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결국 신앙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 백성은 나를 찬양하게 하려고 내가 손수 만든 사람들이다. (사43:21, 우리말성경)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려고 우릴 지으셨다고 하신다. 결국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는 존재이다. 그 찬양은 결국 하나님과 관계 안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연애 할 때 상대방이 무엇틀 좋아하는지를 궁금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즐겁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물어보고 알려고 노력한다. 그 가운데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결국 왜 사는가? 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하기 위해서 산다” 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고민이고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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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날맞이 특별글] 공산주의자 가정에 나타나신 하나님-요셉슐람 장로님이야기
살아가면서 누구나 스승을 만난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스승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저런 사람을 되지 말아야지 하는 스승도 있다. 매년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생님들을 찾아간다. 학창시절에는 너무나 힘들었던 선생님들이 나이가 들면서 이해가 되고 존경이 되면서 찾아가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스승님이 몇분 계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스승님들은 돌아가셨거나 너무 멀리 계셔서 찾아뵙지를 못한다. 그리고 그 스승님들 가운데 나를 기억해 주는 분들은 없다. 다들 희미한 기억 속에서 혹은 그냥 눈치껏 아는 척을 하실 때가 있었다. 괜찮다. 원래 내가 학창 시절에 그렇게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스승님들의 이야기들과 질책들은 여전히 나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Photo by fauxels on Pexels.com 나이가 들고 자라면서 그리고 삶의 터전들이 바뀌면서 스승님들의 가르침들은 중요한 삶의 지표들을 만들어 왔다. 그 가운데 현재 사역에 있어서 큰 방향성을 주신 분은 (고)조용기 목사님이다. 그분의 설교와 책들 그리고 직접 만나면서 들은 조언들은 지금도 나의 삶과 사역의 방향성을 지지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와서 또 그런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쉽게 만나질 수 없는 그런 만남이었다.
이스라엘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메시아닉 공동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60-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시기라고 불리울 수 있는 이 시기에 수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찾아온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외로움과 혼자만의 두려움을 가진 채 이스라엘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서로를 발견하고 공동체-우리로 말하자면 교회와 같은-모습을 가지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열리게 된다.

Photo by Karolina Grabowska on Pexels.com 그런 공동체들 가운데 네티비아라는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요셉 슐람 장로님에 세워진 공동체로서 1969년에 텔아비브에서 시작하여 1982년부터 현재까지 네티비아 성서아카데미라는 비영리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 비영리 단체는 이스라엘 메시아닉 공동체 최초로 유대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자신들 고유의 장소를 만들었다.이전까지 대부분의 메시아닉 공동체들은 교회의 건물을 빌려썼지만 네티비아는 최초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물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지난 4월달에 요셉 슐람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자리에서 장로님은 너무나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고 많은 도전과 가르침을 주었다.
요셉 슐람 장로님(이하 요셉)은 17살 때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분의 가정은 철저한 공산주의 가정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공산주의로자로서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살면서 공산주의적 사고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온 요셉은 종교적 관심도 없었고 그저 삶에 충실했다. 그런 그가 복음을 들었을 때 충격이었다. 그가 살아온 짧은 생애를 송두리채 바꿔버린 것이었다. 신약성서에 나온 예수의 가르침은 그를 흔들었고 하나님 안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쫒겨났다. 복음을 전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부모님은 그를 쫓아내었고 요셉은 지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조지아주의 시골마을에 있는 기독기숙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된다. 이 고등학교는 일종의 대안학교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디서든 사고를 치고 마지막으로 이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주지사의 아들도 있었고 목사의 자녀들도 있었다. 그리고 오갈데 없는 요셉과 같은 유대인들도 있었다. 요셉은 그 학교로 간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였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고 학생들을 전도하여 예배모임을 만들기 까지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히브리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은 어머니의 사고 소식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공장에서 관리직에 있었다. 하루는 공장 직원이 실수로 인화성 물질에 불을 내었고 어머니는 공장을 지키기 위해서 인화성 물질이 담긴 통을 필사적으로 옮기다가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요셉에 공항에 도착하는 날 어머니는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보기를 거절했다. 결국 요셉은 혼자 집을 얻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명절이 되어서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요셉도 자신의 믿음을 굽힐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그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어왔다. 요셉은 자신은 누구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이해하려면 신약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며칠 뒤 어머니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요셉의 어머니는 그가 건낸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의 가르침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한다. 자신은 하나님은 안 믿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훌륭하고 동의한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예수라면 자신이 꼭 따르고 싶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라는 말에 그녀는 놀라워 했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를 따르고 더 알기 원한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언제든지 준비되었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를 데리고 온천으로 갔다. 화상을 입은 그녀는 일반 물에 들어갈 수 없기에 그녀에게 알맞은 온천에서 그녀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녀는 열렬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믿음이 사람이 되었다. 요셉은 지금도 그와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하나님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만 확신할 뿐이다.
어머니의 변화는 곧 아버지와 가족들 모두에게 변화를 일으켰다. 공산주의자에 철저한 관리인이었던 어머니의 회심은 가족들 모두에게 도전을 주었고 요셉은 가족 모두에게 세례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열렬한 후원자이고 지지자이다.
요셉은 매우 뛰어난 지식과 학식의 소유자이다. 그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고고학과 성서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 신약과 화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유대교 예시바(신학교)에서 3년 반동안 유대교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대학에서 다시 유대교 전통과 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그가 이런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 때문이었다. 그는 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는가에 대해서 두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며 메시아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두번째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연합을 위함이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남은 우리가 연합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고 이어주기 위해서 모든 영역에서 공부하고 준비한 것이다.
만나는 동안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하고 귀중했다.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 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점도 많은 도전과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고 살아온 바탕을 뒤집는 것이다. 마치 공산주의가였던 그의 부모님이 신앙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약성경을 준 이는 그런 미래까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기가 지금의 요셉 슐람 장로님을 만들어 준 것이다.

요셉 장로님은 나에게 도전을 주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나누라고 하셨다.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다. 2시간 넘는 시간동안 함께 하면서 유대 공동체 1세대들의 역경과 승리를 옅볼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난 숫자적 부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일하고 계셨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 되고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길에서 그분의 등을 보았다. 반세기의 무거운 짐을 지었던 그의 등에서 여전한 힘을 보았다. 지쳐있지 않은 강인함. 그런 그의 모습에 도전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의 언덕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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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신분일까??-폴란드 난민센터를 다녀와서
나에겐 3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그 친구는 현재 폴란드에 살고 있다. 약 8년전 한국을 떠나 폴란드로 취직하여 가게 된 동생. 수많은 고생과 역경 끝에 현재 꽤 괜찮게 살고 있다. 그런 동생 덕에 이스라엘에 살면서 폴란드를 몇차례 방문할 수 있었고 즐거운 시간을 종종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올해에도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올해 조금은 다른 일로 동생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터진 후 2년동안 해외출입이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제약이 많이 풀리게 되면서 큰 맘을 먹고 동생네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다른 선교사님 커플과 함께 였다. 그 이유는 얼마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난민들이 폴란드로 많이 넘어왔다는 소식을 들어서 였다. 우리와 친한 우크라이나 선교사님도 이번에 폴란드로 넘어와서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함께 기도하고 소식을 듣고자 겸사겸사 방문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서 2백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그 난민들은 집을 떠나야 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채 남의 나라에 와야 했다. 남편은 혹은 남동생이나 남자 형제들은 우크라이나에 남겨두고 떠나와야 했던 그들은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감히 상상이 안간다. 그 중 폴란드에는 우크라이나 난민이 2십만명이나 있다. 그들 중 우리 선교사님의 교회 성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교사님도 전쟁으로 인해서 교회를 떠나야 했던 아픔을 안고 또 성도들을 내버려 둔채 나와야 했던 미안함으로 인해서 맘에 큰 어려움을 갖고 계셨다. 어떻게든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서 폴란드로 오게 된 선교사님은 여러방면으로 알아보고 노력하고 계셨다. 내 동생은 그런 선교사님을 돕고 있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다른 나라이기에 여러가지로 어려운 나라이다. 법적이나 환경적으로 많은 일들이 낯설고 어려운 땅에서 내 동생은 너무나 큰 도움이었다. 그러나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

거리에서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 진행중이었다. 사람들은 환경이 바뀌면 생각이나 자세가 바뀌게 된다. 그러나 한 곳에서 오래 살다보면 그 곳에 익숙해지게 되고 그곳이 모든 삶의 기준이 되게 된다. 한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한국이 기준이 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처럼 사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고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을 그 기준으로만 판단하게 된다. 폴란드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난민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난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집을 떠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가치관의 변화와 세계관의 변화일 것이다. 기존에 살아왔던 모든 기준들이 더이상 자신을 지탱해주지 못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통제되었던 환경을 떠나 통제되지 않고 확신할 수 없는 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은 혼란스러움만 남았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의 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절망하고 주저 앉는 것 밖에 없을 것이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난민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을 충분히 추스르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럽고 힘들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고 다시금 돌아가려고 의지를 세우고 있었다.

주일에 말씀을 나눈 우크라이나 공동체 식구들(동생이 통역을 하였다.) 선교사님은 그런 상황에서 피난온 성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미고 살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집을 알아보고 예배장소를 알아보고 기도하고 구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들을 내 동생과 함께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사역도 열리고 있었다. 현지 폴란드 목사님을 통해서 지역 난민센터의 봉사길도 열리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난민들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언가 마음을 잃어버린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결단 그리고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우연히도 이번 폴란드 행에서는 그런 선교사님의 사역 준비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정말 쉽지않은 기회였다.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센터 중 한 곳에 난민 아이들을 위한 교육센터를 열기 위한 준비를 도울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난민센터를 방문하고 사역적 준비를 도우면서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난민세터 아이들을 위한 임시교육시설을 준비중이다. 사실 나는 동생을 만나러 오랜만에 간 거였다. 2년동안 못만난 동생을 만나러 가게 된 우리에게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시선을 만나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들의 안전한 공간에 살고 있다. 우리는 결코 누구도 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나름 자신의 삶을 통제 아래 두고 오늘 할일과 내일의 일들을 구상하고 이루어가고 있다. 난민이란 마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나 에티오피아 인들 그리고 시리아와 같은 전쟁을 치른 이들이 갖게 되는 신분이라고 생각한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우리가 난민일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폴란드 행에서 나는 난민이라는 것은 결코 전쟁이나 어떤 재해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그리고 느껴지는 환경이 그렇게 되었을때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선교사님이 그랬다. 한국인이고 나라도 그대로 있지만 그 분이 살았고 사역 했던 나라의 상황이 그대로 그분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분 스스로도 자신이 난민이 되었다고 하면서 혼란스러운 그리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조금은 충격이었다. 우리는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에덴동산 이후로 오랜 시간동안 난민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처없이 떠도는 영혼이 된 것이 우리이다. 그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시고 그 영혼들에게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선포하셨다. 영적 전쟁 가운데 난민으로 떠도는 우리가 정착할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난민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알려주고 있는데도 그렇다고 확인시켜주는 대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민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크라이나 난민들 중에 난민 캠프에 남은 이들은 폴란드나 다른 나라에 연고나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이 남았다. 대부분들이 집시이거나 혹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다. 아니 진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탈출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탈출해서 나올 수 있었던 이들은 더 감사해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이들도 있다. 전 국토가 전쟁에 놓여있으나 아직도 괜찮은 곳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도망나온 이들은 위험한 지역에 있던 이들고 아직도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진짜 난민들은 누구일까?
누구도 난민이 될 수 있다. 전쟁 속에서 누구도 난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아니어도 난민이 될 수 있다. 내가 어디에 속하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잃어버렸을 때 난민이 되는 것이다. 나라를 잃어서가 아니라 민족을 잃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속한 것인지를 잃어버렸을 때 난민이 되는 것이다.

네게브 한 복판에 세워진 오브제, 귀환하는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이번 폴란드 행에서 많은 생각들을 해 보았다.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 어느 것부터 정리해야 할까도 고민이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내 글을 읽던 이들 중 “네가 그 상황이 안되어봐서 모른다”라고 할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꼭 당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 있지만 그 상황을 한발짝 물러섰을 때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렇기에 난 한발짝 물러선 입장에서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말이 꼭 맞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난민은 누구일까? 아니 나의 신분은 무엇일까? 그런 의문을 가진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피곤이 쌓여서 이틀동안 쉬고 있지만 다음주부터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적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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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둘째주] 여호와의 절기-유월절 그 풍성한 은혜의 식탁
드디어 유월절이 왔다. 어쩌면 한해에 가장 기다리는 시간 중 하나이다. 이스라엘에는 다양한 절기가 있지만 우리가 읽는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되어지면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무엇보다 큰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세 절기 속에 있다고 본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절기라고 불리우는 ‘유월절(페싸흐)’, ‘오순절(샤부옷)’ 그리고 초막절 혹은 장막절(수콧}’. 이 절기 들 중에서 유월절을 기다리는 이유는 드라마틱하고 재밌는 이야기도 있지만 무엇보다 유월절 만찬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각 절기마다 만찬을 즐기는 것이 풍습이다. 크게 식탁을 차려 다 같이 먹는 풍습은 너무나 풍요롭고 넉넉함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절기 때만큼은 누구라도 풍성한 식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 속에 녹아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사람들이라도 이 절기 때만큼은 어느때보다 풍성한 식탁을 차릴 수 있다.

유월절 식탁의 풍성함은 사실 초막절보다는 덜하다. 초막절은 추수가 끝나는 시기의 절기인만큼 그 어느때보다 풍성한 식탁을 차릴 수 있다. 하지만 유월절 식탁이 가지는 특별함은 다른 절기보다 더 하다. 그 식탁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위한 도구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식탁 위의 음식들이 가지는 의미들은 그 식탁에 차려지는 다른 음식들보다 더 맛깔스러우면서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흥분됨이 있다. 그만큼 유월절 식탁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을 두고 유대인의 절기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잘 못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키기에 유대인의 절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엄연히 말하면 유대인들만이 지키기에 그렇게 불릴 뿐이다. 성경은 이 절기들을 여호와의 절기라고 한다.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인 것이다.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인이 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기 원하면 먼저 그의 집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게 한 다음 본국인과 같이 유월절 의식에 참여하게 하라.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유월절 고기를 먹을 수 없다.
출애굽기 12:48 KLB너희가 매년 정한 때에 공포하여 거룩한 모임을 갖고 지켜야 할 나 여호와의 명절은 이렇다:
레위기 23:4하나님은 절기를 자신의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식탁에서 그 절기의 의미를 잘 보존하고 지켜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인 것이다.
유월절 식탁에는 아주 특별한 접시나 하나 놓인다. 보통 시작의 중앙에 자리잡은 그 접시에는 5가지 혹은 여섯가지의 음식이 놓여 있다. 각각의 음식은 이야기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식탁을 유월절 식탁, 히브리어로 페싸흐 세데르하고 한다. 이 세데르 접시에는 양의 넓적다리뼈, 고수나 파스리 또는 양파파와 허브같은 쓴나물, 하로셋이라고 하는 붉은 색깔의 샐러드, 쓴무로 만는 비트갈은 즙, 소금물, 마지막으로 달걀이 올라간다.

wekipedia 양의 넓적다리는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한다.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이날 양의 넓적다리를 가지고 구이를 하고 뼈를 발라내어 식탁에 놓는다. 이는 유월절에 잡힌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나타낸다. 접시에 놓인 쓴나물, 허브, 쓴즙은 모두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함께 죄악된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쓴나물을 소금물에 찍어먹으면서 조상들이 흘린 눈물과 고난을 기억한다. 하로셋이라고 불리우는 벽돌색깔 혹은 황토빛의 샐러드는 그들이 만들어야 했던 벽돌을 떠올리면서 힘들 삶을 표현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달걀이다. 왜 달걀이 이 접시에 놓인 걸까? 설마 기독교의 부활절처럼 삶을 달걀로 생명을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바치던 제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슬픔을 이 식탁에 올려 놓음으로서 유월절 이야기에 성전이 파괴돈 설픔을 더한 것이다. 이처럼 식탁의 접시에 놓인 음식들은 고난과 고통 슬픔을 기억하게 하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이 외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무교병, 맛짜이다.

Photo by cottonbro on Pexels.com 밀가루와 물 그리고 소금으로 만들게 되는 이 맛짜는 그냥 밀가루 과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맛도 안나는 이 빵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구워낼 수 있다. 누룩, 이스트가 들어가지 않았기에 부풀리는 시간이 필요없이 바로 구워내는 납짝한 과자 빵이다. 이 빵을 유대인들은 총 세장을 준비한다. 그리고 세번쩨 장은 반으로 쪼개고 반을 집안 어딘가에 숨겨둔다. 그 숨겨진 빵을 찾아내는 것이 유월절 아이들이 해야 하는 보물찾기 같은 게임이다. 그리고 찾은 아이는 큰 선물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유월절 식탁에는 총 세 잔의 포도주잔을 마시게 된다. 시작 중간 끝에 각각 마시게 되는데 이 식탁에는 네번째 잔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잔은 마시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이 잔을 “엘리야의 잔”이라고 한다. 이 잔은 후에 엘리야가 와서 메시아의 오심을 전달할 때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이기도 하지마 또한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소망의 절기이기도 한 것이다.

Photo by Cup of Couple on Pexels.com 이처럼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식탁에는 풍성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저 웃고 마시는 식탁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플어내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 그리고 약속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예슈아(예수)의 메세지를 읽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는 그 뼈(양의 넓적다리뼈)가 꺾이지 않고 온전히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악의 쓴뿌리(쓴나물)에서 건져내시고 눈물(소금물)로 지내야 했던 우리의 죄(쓴허브)의 굴레(하로셋, 노동)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달걀)으로 옮겨 주시고 영원한 약속(맛짜)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유월절 식탁에서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부러진 맛짜는 흠없이 죽으신 예슈아(예수)를 떠올리게 하며 감추인 그 몸이 발견되어 생명이 되셨음을 알게 하신다.
재밌지 않는가? 우리가 부활절 달걀을 돌리면서 부활에 대해서만 집중할 때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그리고 그 성취를 기리고 있다. 다만 그들은 아직 그 약속의 성취이신 예슈아(예수)를 그 식탁으로 초대하지 못했을 뿐이다.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는 유월절은 부활절과 함께 지켜져야 더 큰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을 지키지만 예수의 부활이 어떤 큰 의미 속에서 나타난 것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권능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이다. 그렇기에 유월절이 없는 부활절은 어쩌면 반쪽의 이해만을 가지고 보게 될 수도 있다.
오늘 식탁의 풍성함을 떠올리면서 유월절만이 아닌 부활절의 풍성한 식탁이 우리 앞에 펼쳐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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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첫째주] 시작
올해 이스라엘의 4월 1일은 성경의 아빕월 1일, 니산월 1일이다.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이 있는 달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한해의 시작으로서 지킬 것을 명하셨다. 이스라엘 민족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빕월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 후에 찾아온 새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통과했던 신광야의 한자락 할아버지 야곱을 따라서 들어와 살게 된지 430년 큰 민족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동안 그 땅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의 문화 속에서 자라왔다. 억압 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억압받은 기간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간이 무슨 상관이랴! 억압과 박해는 기간과는 상관없이 힘든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억압과 박해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그저 조상 들로부터 전해 들어온 하나님께 대한 간구 였을까? 그들은 하나님께 어려움을 호소하고 하나님은 들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저 신께 대한 간구 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약속에 대해서 계속 기억하고 계셨다.
‘.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 과 이삭 과 야곱 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출애굽기 2:24-25
이 표현은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한글 성경의 뉘앙스를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히브리식 표현에는 정반대의 뉘앙스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오신 언약을 기억하고 계셨고 그들의 탄식을 들으셨다’라고 나온다. 하나님은 언약을 잊어버리신 적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과 세운 언약대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의 한 이야기이다.

Form Blackhawk ministry https://blackhawkministries.org 이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가운데 있던 후손들을 이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만나고 그들과 언약을 맺기 위해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신 것이 유월절 이야기의 핵심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 것이 아닌 이전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신 것이다. 보험 약관이 바뀌어서 갱신되는 것이 아닌 약관은 그대로이지만 보험 수혜자가 바뀐다고 할까?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금 갱신하기 위한 부르심의 사건, 그것이 유월절이다. 그 유월절이 담긴 달이 아빕월이고 그렇기에 아빕월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과 하나님의 언약이 다시금 갱신되는 새로운 순간인 것이다.
그 시작을 이 곳 네게브 공동체와 함께 했다. 음식을 나누고 찬양을 나누고 그 가운데 함께 새날 새 시작을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무척이나 고무적이고 감사한 순간이었다. 전세계에서 모인 청년들이 함께 둘러앉아서 하나님을 이스라엘 네게브 땅 한 가운데서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였다. 앞으로 오게 될 유월절이 더욱 기대가 될 첫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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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셋째주] 갈망
이스라엘은 우기이다. 10월 장막절 이후부터 4월 유월절이 끝날 때까지 비가 내리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 내린 비로 이스라엘은 한해를 지내는 물을 저장한다. 그래서 이 때 비가 많이 내리면 한해가 풍성해 질 수 있다. 그러나 비가 적으면 한해의 수확이 어려워 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비를 바라게 된다
네게브에는 비가 온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비가 많은 지역이 아니기에 우기에도 비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예루살렘이나 북부에 비가 많이 내려도 네게브 지역에는 비가 적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비를 보려고 그리고 비가 오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강과 작은 폭포들을 구경하려고 광야로 나간다.
그리고 비가 오고 나면 메마른 광야는 푸른 초장으로 바뀌어 간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광야에는 꽃이피고 황토빛 들판은 각양각색의 야생화들로 넘쳐나게 된다. 물론 푸르름이 항상 있는 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이게 뭐가 신기할까 하겠지만 1년 중 단 몇달이 안되는 시간만 꽃이 피어나는 곳에 살다보면 그 메마름이 변하여 풍성함으로 바뀌는 시간은 신비하기만 하다.

그 가운데 광야를 나가 그 꽃들 사이에 앉아 있다보면 성경의 말씀이 떠오른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이사야 35:2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물이 없는 광야에 비가 잠시 내렸다고 그렇게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줄을 말이다. 하지만 그 꽃들은 어디서 누가 심어놓은 것이 아니라 광야의 흙 속에 땅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비를 맞고 소생하는 것이었다. 그 꽃들과 풀들은 1년중 비가 내리는 이 순간을 갈망하고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한 순간이긴 하지만 한껏 자신들을 뽐내며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편의 저자가 말했듯이 우리가 주를 갈망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비록 메마른 광야같은 삶 속에 있다가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누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꽃보다 더 화려하게 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갈망헤야 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 속에서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분의 은혜의 단비를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노력이 아닌 그분의 은혜, 그것은 우리가 갈망하고 기대하고 기다릴때 가장 멋지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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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첫째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이다
이스라엘에 다시 온 지 벌써 석 달째에 접어든다. 처음 한달동안은 격리와 함께 집안청소로 보냈다면 그 다음 한달은 이스라엘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4개월 밖에 떠나 있지 않았지만 미드라샤에는 2년이 넘은 시간을 떠나 있었다. 그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다. 학생들 모임도 변화가 많았고 나가고 들어가는 인원들도 많았다. 그리고 케힐라(이스라엘 믿는 자들의 모임, 교회와 같은 공동체모임을 케힐라, Kehilah라고 한다.)에도 변화가 있었다. 자주 나오던 유대인 친구들은 히브리어 모임을 찾아서 나갔고 남은 분들이 학생들과 함께 예배 모임을 유지하면서 영어 모임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다시 오면서 이 곳 예배와 함께 학생들 모임을 섬기며 이 지역에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받았다. 이 곳에 사랑과 헌신으로 흘려 내보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보니 그동안 참 어렵게 이 모임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함과 동시에 이 곳에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다행이도 학생들 모임은 자체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었고 물론 그 가운데 부족한 부분이나 쉽지 않은 부분들도 있었지만 다들 열심히 잘 해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면 묵상하던 중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사역당시 나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이 너무나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곳으로 보내시면서 나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때 나는 누구인가였다.
예전 사역하면서 마음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적이 있다. 내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삶이 무겁게 날 짖누르는 상황에서 그저 일로서 나를 정당화하고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는 사역적 일 외에는 모든 것이 내적으로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그 시간들은 예배도 그 어떤 것도 온전하지 못했다. 너무나 힘든 나머지 예배인도조차 힘들었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이었다.
예배를 올라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기도하던 그 때 내 자신의 이중성과 온전하지 못함이 예배에 오르지 못할 정도였다. 너무나 힘든 나머지 그날 예배인도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순간을 기다리셨다. 아니 그 순간도 나는 하나님께 너무 교만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내 자신이 힘들어서 예배를 그만두려고 했다. 하나님보다 그 때 내 자신의 상황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내 자신은 겸손하다고 생각했던 고백은 사실 교만의 고백이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예배하지 못하겠습니다. 전 예배할 자격이 없어요” 하지만 그 고백마저도 나의 교만이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살며시 제 등을 떠미시며 요구하셨다.
“난 너의 예배를 원한다”

나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예배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존재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온전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아주신다. 그분이 우리를 예배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온전한 모습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착각한다. 예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 앞에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나오라고 한다. 내 자신의 죄를 들고 하나님께 나오라고 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우리를 받아들여주신다.
나의 예배는 가장 부족함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채워지게 된다. 나의 행함이 아닌 주의 행하심으로 나의 온전함이 아닌 그분의 온전함으로 인해서 드려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에게 요구하신다. 나의 예배를 요구하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 란 질문에 나는 예배자라고 답한다. 예배하는 자가 나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다시 사역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또 다시 요구하셨다. 다시금 일로 돌아 가려던 나에게 하나님은 예배자로 설 것을 요구하셨다. 누군가가 본다면 가장 어리석은 자리로 가는 것일 수 있다.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도 아닌 그저 예배의 자리에서 기타를 치며 찬양하는 것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역에 있어서 나의 일들은 뭔가 보잘것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가장 중요하며 본질적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보다 먼저 되어야 할 것이 예배의 자리이며 예배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가장 첫번째 사역은 이 곳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
요한복음 4:24 -
[2022년 1월 마지막] 기대했던 것 보다 더하시는 은혜
지난 화요일 25일이 드디어 기다리던 비자국 방문의 날이었다. 비자국 방문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비자변경을 위해서는 꼭 가야만 하는 곳이라 그날 예약이 잡혔고 이른 아침에 준비를 하고 친구네 집 차를 빌려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코로나 이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비자국 시스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예전에는 언제나 비자국을 가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부터 비자국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남들보다 일찍가야 일찍 대기표를 받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에만 일을 하는 비자국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모든 시스템은 온라인 예약제로 전환되면서 많은 불편함을 가져왔다. 아이러니다. 한국은 온라인으로 전화되면서 많은 편리함이 생겼던 반면 이스라엘은 온라인으로 전화되면서 많은 불편함을 가져왔고 온라인으로 전환된 것은 예약제라는 것일뿐 여전히 비자국 내부에서는 줄을 서고 기다리는 시간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비자국 직원들의 불편함은 여전히 나에게 어려운 것들이었다. 어떠한 원칙이 있겠지만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성향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위압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는 사실 어느나라 비자국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이스라엘에서 만나는 분위기는 또 다른 불편함이 있었다.
이 날도 이런 마음의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마음을 접고 비자국을 방문하였다. 온라인으로 예약한 덕분에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줄은 없었지만 내부에서의 줄은 여전하였다. 긴장감도 여전하였다. 비자국을 찾는 사람들 중 다수는 외국인으로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이들이고 이 중에는 유대인이면서 아직 시민권이나 거주권을 받지 못한 자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들 중 한사람으로 대기표를 받고 기다렸다. 이번에 내가 받은 비자는 종교비자이다. A3라는 카테고리로서 이스라엘 내에서 종교인, 즉 기독교 목사로서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종교비자 받기가 매우 어렵고 복잡하다. 그리고 그 절차나 조건들이 매우 까다롭다. 그런 비자를 진정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받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겠다.


어찌 되었던 졸이던 맘으로 인터뷰를 기다리고 드디어 차례가 되어서 창구로 갔다. 그리고 10분 뒤 아무런 어려움 없이 너무나 쉽게 비자변경을 하였고 1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비자국을 나오게 되었다. 모든 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한 시간이었다. 누구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멀티비자(출입국이 1년간 자유로운 비자)를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비자를 서포트 해 주는 단체에서 비자비용을 이미 지불하여서 우리는 멀티비자 비용만 지불하면 되었다. 모든 것이 순적하였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순적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었다.
다시 네게브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에 광야를 나갔다. 어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직 비자 이외에도 해결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 아직 정비하고 정리하고 또 계획을 세우고 만들어 가야 할 일들이 남아있다. 재정적인 부분도 채워지고 만들어가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제 시작하는 기분이다. 이제 새로운 신분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이 순간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고린도전서 15:10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한 은혜가 있다. 하나님은 이제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하시고자 나를 출발선에 세우셨다. 전혀 다른 신분으로 이스라엘에 서게 되었다. 이제 더 큰 은혜와 더 큰 역사가 시작 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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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1일] 샤밧은 온전한 신뢰이다.

샤밧 아침에 나온 할라(안식일빵) 어김없이 오늘도 샤밧날이 왔다. 샤밧, 이스라엘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온의 시간이다. 물론 샤밧을 꼭 이스라엘에서만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뱟(안식일)은 어디서나 지킬 수 있다. 그날만 기억하여 구분하고 안식일로서 지켜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만큼 잘 지켜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 살 때 샤밧,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내고 있는 가를 볼 수 있었다. 안식일 저녁, 금요일 저녁이 되면 모든 공공교통 수단, 버스나 트램들은 운행을 중단하고 길거리 상점은 문을 다 닫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문을 닫은 상점거리고 사람들은 돌아다니지 않는다. 한때 코로나 이전에 이런 농담도 있었다. “샤밧, 안식일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관광객이거나 무슬림들이다. ” 그만큼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집에서 지키면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가졌다.

보통 일반적으로 샤밧, 안식일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그것도 샤밧의 의미 중 하나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하셨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
창세기 2:2-3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일곱째되는 날에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을 복되게 하셨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 안식일은 다시는 지켜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고 욕심으로 인해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얼마간 하나님이 하신 대로 안식을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에게 악이 만연하고 죄가 만연했다고 한다.
죄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죄를 무언가를 잘못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강도, 살인, 거짓말 등과 같은 것은 죄로 인해서 벌어진 행동이지 죄 그 자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죄는 행함이전에 그 마음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성경에서 죄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악하다고 하시고 그것을 죄라고 명하신다. 최초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가르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다.

Photo by Skitterphoto on Pexels.com 선악과는 죄를 짓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기준이었다. 하나님은 동산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허락하셨지만 단 하나 선악과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99%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단 1%를 하나님의 영역으로 정해놓으신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였어도 우리가 하나님께 할말은 없지만 하나님은 전혀 반대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자신을 위한 자리를 1%만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이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계명이자 언약이었다. 그것을 지키지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악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가졌으나 그 1%의 부족함을 참지 못하고 선을 넘고 만 것이다. 그 선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라는 부분이었다.
“정녕 죽으리라” -인간을 죽이고 협박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절대적인 선을 그려 놓은 신 것이다. 그 당시 인간이 과연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았을까? 그들에게 죽음은 과연 공포였을까? 언제부터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뜨리고 그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욕심과 불신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순간에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공포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제한적 상황이 사람을 가장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언가 아파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겁을 내고 의학적 도움과 함께 신적 도움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죽을까 하노라로 바꾸면서까지 하나님의 자리를 욕심내어 보았지만 결국 사람이 얻은 것은 불신으로 인한 영원한 이별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사라진 안식이었다. 이제 인간은 노력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저주이자 축복을 얻게 되었다.
왜 이것이 저주이자 축복일까? 저주일수는 있지만 축복은 아니지 않을까? 아니다. 이것은 저주이기도 하지만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한 노동과 고통은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끊이지 않을 것이기에 저주인 것이다. 하지만 그와같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다. 그날은 특별히 구별하여 지키라고 한 것이다. 단순하게 쉬는 날이 아니라 그 날을 허락하신 이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얻은 안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동 후의 다음 노동을 위한 잠깐이 휴식이 아닌 일주일이 모든 일을 마치고 감사하는 안식을 기억하게 하신 것이다.
안식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신뢰이다. 안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순간이다. 모든 노동과 괴로움과 걱정들을 다 하나님 안에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
마태복음서 11:28 RNKSV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맞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인자로서 수고한 인생사들을 책임지시기 위해서 오셨다. 안식하지 못하는 불안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자 오셨다. 그분은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이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세상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신뢰이며 확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믿음을 정의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
히브리서 11:1 RNKSV진정한 안식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안식은 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모든 일을 마치신 하나님이 만드신 날이다. 그 위대한 하나님이 지치실리는 없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과 피조물들에게는 안식이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런 배려는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한가지만을 요구하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
출애굽기 20:8 RNKSV그 명령을 기억하고 지킨다는 것은 곧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할 때에야만 가능하다. 그분과의 신뢰가 회복되었을 때 그를 믿을 때 우리는 비로서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샤밧, 안식일에 광야를 바라보면서 벤치에 몸을 기대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안식에 잠겨보고자 한다. 그분을 신뢰하면서 연약한 내 믿음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봐주시는 그분을 믿으며 오늘 충분히 안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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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3일 단상] 네게브에 씨앗을 심다
네게브의 일상은 평범합니다. 특히나 저희가 살고 있는 곳의 일상은 너무나 단조롭습니다.

하루의 시작과 함께 광야를 비춰오는 햇살을 마주합니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면 아침 햇살이 집안 구석구석을 비추고 기지개를 펴고 아침 일찍 묵상을 마치고 나면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는 일로 아내는 분주하게 부엌에서 일을 합니다. 저는 그 사이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햇빛은 마주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청소를 준비합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고 나면 본격적으로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물걸레질로 한시간 가량을 청소합니다. 그리고 나면 아내와 함께 광야로 산책을 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걸으면서 묵상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나면 각자의 일에 전념합니다. 보통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고 말씀 묵상과 함께 즐거운 이야기 혹은 각자의 일상의 마무리로 마감을 합니다. 그렇게 일단은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에 온지 한달도 채 안되었고 또한 코로나로 인해 모든 일상들이 제약이 있다보니 적응하는 기간으로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코로나의 여파로 인해 그리고 오미크론 변이로 인해서 일상이 쉽지는 않습니다. 저희의 삶에도 어려운 점 중 하나가 바로 물가의 변화와 환경적 변화로 인해서 재정의 사용이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 점입니다. 그리고 코로나가 가져온 환율의 차이가 큰 재정적 타격으로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전보다 사용하는 재정이 약 15%이상 상승하였기에 체감되는 어려움은 더 커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손길에 있기에 저희는 필요한 만큼에 대해서 최소한으로 절약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삶에 찾아온 귀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같이 교제하면서 지내던 친구가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친구에게 유대인 친구가 있습니다. 저희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농장을 하는 친구입니다. 척박한 네게브 땅에 밭을 일구면서 아채를 재배해서 파는 친구입니다. 이 유대인 친구가 저희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사실 저희 친구(이하 “K”라고 하겠습니다)는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유대인 남편을 둔 크리스천입니다. 오래전에 이스라엘에 와서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복음적인 삶을 사는 친구입니다. K는 언제나 기회가 되면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나누면서 그들에게 예슈아(예수)를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생긴 이 유대인 친구는 오랫동안 관계를 해왔고 몇년전부터 농사를 짓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올해 이스라엘은 농경 안식년입니다. 전 국토의 대부분을 안식년으로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땅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친구는 K가 농사를 대신 지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아직 농사를 한지 4년도 채 안되었기에 아직은 더 농사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하지만 나라 전체가 농사를 쉬게 했기 때문에 자신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인이기에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더러 대신 씨를 뿌리고 작물을 재배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저희는 이런 귀한 기회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침 일찍 준비하여 그들의 농장에 도착하여 흙을 만지면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씨를 뿌리는 일들을 도왔습니다. 척박한 네게브 땅에 채소를 키우고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이 놀라고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척박한 마른 땅이지만 농사꾼이 물을 대고 땅을 경작하니 소산이 넘쳐나는 놀라운 곳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흙내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건강한 오르가닉 채소들이 너무나 싱싱했습니다. 농장주인인 유대인 친구는 나와서 저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가르쳐주었고 저희는 흙에 씨앗을 심는 귀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아마도 몇일이 안되어서 저희가 뿌린 씨는 싹을 티우고 자라서 건강한 작물로 자랄 것입니다. 농장주인 친구는 저희에게 맛있는 채소를 한아름 선물하고 다음번에도 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흔쾌하게 그 기쁨을 누리겠다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흙을 만지는 기쁨과 네게브 땅에 씨를 뿌리는 은혜를 누림에 감사하고 다음번에 잘 자란 작물을 기대하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K는 유대인 친구들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을 통하여 예슈아를 듣게 되고 나누게 되면서 점점 믿음을 갖게 되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는 행함들이 작기는 하지만 이런 관계 속에서 더욱 하나님이 그들의 맘을 열고 함께 주님을 찬미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