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누구나 스승을 만난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스승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저런 사람을 되지 말아야지 하는 스승도 있다. 매년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생님들을 찾아간다. 학창시절에는 너무나 힘들었던 선생님들이 나이가 들면서 이해가 되고 존경이 되면서 찾아가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스승님이 몇분 계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스승님들은 돌아가셨거나 너무 멀리 계셔서 찾아뵙지를 못한다. 그리고 그 스승님들 가운데 나를 기억해 주는 분들은 없다. 다들 희미한 기억 속에서 혹은 그냥 눈치껏 아는 척을 하실 때가 있었다. 괜찮다. 원래 내가 학창 시절에 그렇게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스승님들의 이야기들과 질책들은 여전히 나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나이가 들고 자라면서 그리고 삶의 터전들이 바뀌면서 스승님들의 가르침들은 중요한 삶의 지표들을 만들어 왔다. 그 가운데 현재 사역에 있어서 큰 방향성을 주신 분은 (고)조용기 목사님이다. 그분의 설교와 책들 그리고 직접 만나면서 들은 조언들은 지금도 나의 삶과 사역의 방향성을 지지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와서 또 그런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쉽게 만나질 수 없는 그런 만남이었다.
이스라엘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메시아닉 공동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60-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시기라고 불리울 수 있는 이 시기에 수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을 찾아온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외로움과 혼자만의 두려움을 가진 채 이스라엘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서로를 발견하고 공동체-우리로 말하자면 교회와 같은-모습을 가지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열리게 된다.

그런 공동체들 가운데 네티비아라는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요셉 슐람 장로님에 세워진 공동체로서 1969년에 텔아비브에서 시작하여 1982년부터 현재까지 네티비아 성서아카데미라는 비영리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 비영리 단체는 이스라엘 메시아닉 공동체 최초로 유대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자신들 고유의 장소를 만들었다.이전까지 대부분의 메시아닉 공동체들은 교회의 건물을 빌려썼지만 네티비아는 최초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물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지난 4월달에 요셉 슐람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자리에서 장로님은 너무나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고 많은 도전과 가르침을 주었다.
요셉 슐람 장로님(이하 요셉)은 17살 때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분의 가정은 철저한 공산주의 가정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공산주의로자로서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살면서 공산주의적 사고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온 요셉은 종교적 관심도 없었고 그저 삶에 충실했다. 그런 그가 복음을 들었을 때 충격이었다. 그가 살아온 짧은 생애를 송두리채 바꿔버린 것이었다. 신약성서에 나온 예수의 가르침은 그를 흔들었고 하나님 안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쫒겨났다. 복음을 전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부모님은 그를 쫓아내었고 요셉은 지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조지아주의 시골마을에 있는 기독기숙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된다. 이 고등학교는 일종의 대안학교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디서든 사고를 치고 마지막으로 이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주지사의 아들도 있었고 목사의 자녀들도 있었다. 그리고 오갈데 없는 요셉과 같은 유대인들도 있었다. 요셉은 그 학교로 간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였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고 학생들을 전도하여 예배모임을 만들기 까지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히브리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은 어머니의 사고 소식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공장에서 관리직에 있었다. 하루는 공장 직원이 실수로 인화성 물질에 불을 내었고 어머니는 공장을 지키기 위해서 인화성 물질이 담긴 통을 필사적으로 옮기다가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요셉에 공항에 도착하는 날 어머니는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보기를 거절했다. 결국 요셉은 혼자 집을 얻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명절이 되어서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요셉도 자신의 믿음을 굽힐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그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어왔다. 요셉은 자신은 누구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이해하려면 신약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며칠 뒤 어머니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요셉의 어머니는 그가 건낸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의 가르침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한다. 자신은 하나님은 안 믿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훌륭하고 동의한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예수라면 자신이 꼭 따르고 싶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라는 말에 그녀는 놀라워 했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를 따르고 더 알기 원한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언제든지 준비되었다고 하였다. 요셉은 그녀를 데리고 온천으로 갔다. 화상을 입은 그녀는 일반 물에 들어갈 수 없기에 그녀에게 알맞은 온천에서 그녀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녀는 열렬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믿음이 사람이 되었다. 요셉은 지금도 그와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하나님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만 확신할 뿐이다.
어머니의 변화는 곧 아버지와 가족들 모두에게 변화를 일으켰다. 공산주의자에 철저한 관리인이었던 어머니의 회심은 가족들 모두에게 도전을 주었고 요셉은 가족 모두에게 세례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열렬한 후원자이고 지지자이다.
요셉은 매우 뛰어난 지식과 학식의 소유자이다. 그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고고학과 성서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 신약과 화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유대교 예시바(신학교)에서 3년 반동안 유대교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대학에서 다시 유대교 전통과 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그가 이런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 때문이었다. 그는 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는가에 대해서 두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며 메시아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두번째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연합을 위함이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남은 우리가 연합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고 이어주기 위해서 모든 영역에서 공부하고 준비한 것이다.
만나는 동안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하고 귀중했다.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 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관점도 많은 도전과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고 살아온 바탕을 뒤집는 것이다. 마치 공산주의가였던 그의 부모님이 신앙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약성경을 준 이는 그런 미래까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기가 지금의 요셉 슐람 장로님을 만들어 준 것이다.

요셉 장로님은 나에게 도전을 주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나누라고 하셨다.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다. 2시간 넘는 시간동안 함께 하면서 유대 공동체 1세대들의 역경과 승리를 옅볼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난 숫자적 부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일하고 계셨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 되고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길에서 그분의 등을 보았다. 반세기의 무거운 짐을 지었던 그의 등에서 여전한 힘을 보았다. 지쳐있지 않은 강인함. 그런 그의 모습에 도전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의 언덕을 내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