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1일] 샤밧은 온전한 신뢰이다.

샤밧 아침에 나온 할라(안식일빵)

어김없이 오늘도 샤밧날이 왔다. 샤밧, 이스라엘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온의 시간이다. 물론 샤밧을 꼭 이스라엘에서만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뱟(안식일)은 어디서나 지킬 수 있다. 그날만 기억하여 구분하고 안식일로서 지켜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만큼 잘 지켜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 살 때 샤밧,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내고 있는 가를 볼 수 있었다. 안식일 저녁, 금요일 저녁이 되면 모든 공공교통 수단, 버스나 트램들은 운행을 중단하고 길거리 상점은 문을 다 닫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문을 닫은 상점거리고 사람들은 돌아다니지 않는다. 한때 코로나 이전에 이런 농담도 있었다. “샤밧, 안식일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관광객이거나 무슬림들이다. ” 그만큼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집에서 지키면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가졌다.

보통 일반적으로 샤밧, 안식일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그것도 샤밧의 의미 중 하나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하셨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

창세기 2:2-3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일곱째되는 날에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을 복되게 하셨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 안식일은 다시는 지켜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고 욕심으로 인해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얼마간 하나님이 하신 대로 안식을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에게 악이 만연하고 죄가 만연했다고 한다.

죄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죄를 무언가를 잘못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강도, 살인, 거짓말 등과 같은 것은 죄로 인해서 벌어진 행동이지 죄 그 자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죄는 행함이전에 그 마음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성경에서 죄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악하다고 하시고 그것을 죄라고 명하신다. 최초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가르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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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는 죄를 짓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기준이었다. 하나님은 동산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허락하셨지만 단 하나 선악과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99%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단 1%를 하나님의 영역으로 정해놓으신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였어도 우리가 하나님께 할말은 없지만 하나님은 전혀 반대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자신을 위한 자리를 1%만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이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계명이자 언약이었다. 그것을 지키지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악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가졌으나 그 1%의 부족함을 참지 못하고 선을 넘고 만 것이다. 그 선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라는 부분이었다.

“정녕 죽으리라” -인간을 죽이고 협박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절대적인 선을 그려 놓은 신 것이다. 그 당시 인간이 과연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았을까? 그들에게 죽음은 과연 공포였을까? 언제부터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뜨리고 그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욕심과 불신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순간에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공포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제한적 상황이 사람을 가장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언가 아파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겁을 내고 의학적 도움과 함께 신적 도움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죽을까 하노라로 바꾸면서까지 하나님의 자리를 욕심내어 보았지만 결국 사람이 얻은 것은 불신으로 인한 영원한 이별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사라진 안식이었다. 이제 인간은 노력하고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저주이자 축복을 얻게 되었다.

왜 이것이 저주이자 축복일까? 저주일수는 있지만 축복은 아니지 않을까? 아니다. 이것은 저주이기도 하지만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한 노동과 고통은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끊이지 않을 것이기에 저주인 것이다. 하지만 그와같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다. 그날은 특별히 구별하여 지키라고 한 것이다. 단순하게 쉬는 날이 아니라 그 날을 허락하신 이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얻은 안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동 후의 다음 노동을 위한 잠깐이 휴식이 아닌 일주일이 모든 일을 마치고 감사하는 안식을 기억하게 하신 것이다.

안식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신뢰이다. 안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순간이다. 모든 노동과 괴로움과 걱정들을 다 하나님 안에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

마태복음서 11:28 RNKSV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맞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인자로서 수고한 인생사들을 책임지시기 위해서 오셨다. 안식하지 못하는 불안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자 오셨다. 그분은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이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세상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신뢰이며 확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믿음을 정의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

히브리서 11:1 RNKSV

진정한 안식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안식은 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모든 일을 마치신 하나님이 만드신 날이다. 그 위대한 하나님이 지치실리는 없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과 피조물들에게는 안식이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런 배려는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한가지만을 요구하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

출애굽기 20:8 RNKSV

그 명령을 기억하고 지킨다는 것은 곧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할 때에야만 가능하다. 그분과의 신뢰가 회복되었을 때 그를 믿을 때 우리는 비로서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샤밧, 안식일에 광야를 바라보면서 벤치에 몸을 기대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안식에 잠겨보고자 한다. 그분을 신뢰하면서 연약한 내 믿음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봐주시는 그분을 믿으며 오늘 충분히 안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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